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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편소설 모래톱 이야기 5부

숙자 마미 2007. 2. 2. 11:01
단편소설 모래톱 이야기 5부

건우네 집이 있는 조마이섬 일대는 어느덧 벌건 홍수에 잠겨 가고 있지 않은가!

 수박이 문제가 아니다.

다시 흩날리기 시작하는 차창 밖의 빗속을 뚫고서,

내 시선은 잘 보이지도 않는 조마이섬 쪽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나릿배 통학생임더!” 하던 건우 군의 가냘픈 목소리가

 갑자기 귀에 쟁쟁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고개 넘어서부터 차는 더욱 끼우뚱거렸다.

논두렁을 밀고 넘어오는 물살이 숫제 쏴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길을 사뭇 덮었다.

 

때로는 길과 논밭이 얼른 분간이 안 되어, 가로수를 어림해서 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차 안의 손님들은 한층 더 떠들어 댔다.

대부분이 무슨 사연들이 있어서 가는 사람들이었겠지만,

그러한 사연들보다 우선 눈앞의 사정에 더욱 정신을 파는 것 같았다.
하단 나루께는 이미 발목물이 넘었다.

‘사라호’에 데인 경험이 있는 그 곳 주민들은, 잽싸게 이불이랑 세간 부스러기를

산으로 말끔 옮겨 놓았고,

부랴부랴 끌어올린 목선들이 여기저기 나둥그러져 있는 길 위에는,

볼멘소리를 내지르는 아낙네와 넋 잃은 듯한 사내들이 경황 없이 서성거릴 뿐이었다.

 

 물론 나룻배가 있을 리 없었다.

예측 안 한 바는 아니지만, 행여나 싶었던 마음에도 실망은 컸다.
배 없는 나루터를 비롯해서 가까운 강가에는,

경비를 나온 듯한 소방대원 같은 복장의 사람들과 순경 한 사람이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이 오지 마라,

혹은 가지 말라 외쳐도 사람들은 들은 체 만 체했다.

물이 점점 더 붇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밀려오는 강물만 맥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산이라도 뒤엎었는지 황토로 물든 물굽이가 강이 차게 밀려 내렸다.

 웬만한 모래톱이고 갈밭이고 남겨 두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뭉개고 삼킬 따름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듯 우르르하는

강울림 소리는 더욱 무엇을 노리는 것같이 으르렁댔다.
둑이 넘을 정도로 그악스럽게 밀려 내리는 것은 벌건 물굽이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들녘들을 휩쓸었는지,

보릿대랑 두엄더미들이 무더기 무더기로 흘러내리는가 하면,

수박이랑, 외, 호박 따위까지 끼리끼리 줄을 지어 떠 내려왔다.

 이상스런 것은 그러한 것들이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강 한가운데로만 줄을 지어 지나가는 것이었다.
“쳇, 용케도 피해 간다!”
저만큼 떨어진 데서 장대 끝에 접낫을 해 단 억척보두들이 둥글둥글한 수박의

행렬을 향해 군침들을 삼켰다.


“그까진 수박은 껀지서 머할라꼬? 하불실 돼지 새끼라도 아담아 내야지?”
이런 농지거리도 들렸다. 역시 접낫을 해 든 주제에,

이들은 그저 물 구경을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엄연히 생활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대담한 태도와 농담에 잠깐 정신을 팔다가,

 다시 조마이섬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부슬비가 계속 광풍에 흩날리고 있었다.

얼핏 홍적기(洪積期)를 연상케 하는 몽롱한 안개비 속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별할 도리가 없었다.
‘건우네 집은 벌써 홍수에 잠기지나 않았을까?’
불안한,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물이 이 정도로 불어나면 건너편 조마이섬께는 어찌 되지오?‘
생면 부지한 접낫패들에게 불쑥 묻기까지 하였다.
“조마이섬?”
돼지 새끼를 안아 내겠다던 키다리가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맹지면에서는 땅이 조금 높은 편이라카지만,

 물이 이래 불으면 마찬가지지요.

 만약 어제 그런 소동이 안 일어났이문 밤새 무슨 탈이 났을지도 모를 끼요.”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가요?”
나는 신경이 별안간 딴 곳으로 쏠렸다.
“있다 뿐이라요? 문딩이 쫓아낼 때보다는 덜했겠지마 매립(埋立)인강

먼강 한답시고 밀가리만 잔득 띠이 처먹고 그저 눈가림으로 해 놓은 둘(둑)을

섬 사람들이 우 대들어서 막 파헤쳐 버리고,

본래대로 물길을 티놨다 카드만요. 글 안 했으문…….‘
키다리는 혼자서 신을 내가며 떠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게. 괜히 혼날라꼬.”
곁에 있던 약삭빠른 얼굴의 사내가 이렇게 불쑥 쏘아붙이듯 하더니,

 마침 저만큼 떠내려오는 널빤지를 향해 잽싸게 접낫을 던졌다.

그러나 걸리진 않았다. 그렇게 허탕을 친 게 마치 이쪽의 잘못이나 되는 듯,
“조마이섬에 누가 있소?”
내뱉듯한 소리가 짐짓 퉁명스러웠다.
“건우란 학생이 있어서…….”
나는 일부러 학생의 이름까지 대보았다.

약삭빠른 눈초리가 다시 물굽이만 쏘아 보고 말이 없으니까, 또 키다리가,
“그 아이 아배가 누군교?”
하고 나를 새삼 쳐다보았다.
“아버진 없고, 즈 할아버지 별명이 갈밭새 영감이라더군요.”
나는 건우 할아버지의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아, 그렁기요? 좋은 노인임더.”
키다리는 접낫대를 세워 들더니,
“조마이섬의 인물 아잉기요. 어지(어제) 아침 이 곳에 지내갔는데,

그 뒤 대강 알아 봤거든……. 가고 난 뒤 얼마 안 되서 그 일이 났단 말이여.”
말머리가 어느덧 자기들끼리로 돌아갔다. 나는 굳이 파고 묻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판잣집 용마루 비슷한 길다란 나무가 잠겼다 떴다 하며 떠내려가자,

조금 떨어진 신신 바위 짬에서 별안간 쬐깐 쪽배 하나가 쏜살같이 나타나더니,

기어코 그놈에게 달라붙어서 한참 파도와 싸우며 흐르다가 마침내

저 아래쪽 기슭에 용케 밀어다 붙였다.

박수를 치기보다는 모두 숨을 죽이고 바라보기만 했다.

 용감하다기보다 차라리 처참한 광경이었다.

나는 거기서 누구에게도 보장을 받아 오지 못한 절박한 생활을 읽었다.

 

 한 표의 값어치로서가 아니라,

다만 살기 위해서 스스로 죽을 모험을 무릅쓰는 그러한 행위는,

부질없이 그것을 경계하거나 방해하는 힘을 물리침으로써만 오히려 목숨

그 자체를 이어 갈 수 있다는 산 증거 같기도 했다.
‘갈밭새 영감이나 송아지 뺄갱이도 그냥 있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조마이섬의 일이 불현듯 더 궁금해져서 이내 구포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

다리만 건너면 조마이섬에 가까이까지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구포 다릿목에서 차를 내렸으나 물은 이미 위험 수위를 훨씬 돌파해서,

 다리는 통금이 돼 있었다. 비상 경계의 붉은 깃발이 찢어질 듯 폭풍우에 펄럭이고,

 다릿목을 건너지른 인줄 곁에는 한국인 순경과 미군이 버티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고무 비옷에 철모를 푹 눌러 쓰고 방망이를 해 든 포옴이

 여간 엄중해 뵈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슨 핑계들을 꾸며 대고 용케 건너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다리 위에서 유유히 물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나도 간신히 그들 틈에 끼었다.

우르르르하는 강울림은 다리 위에서 듣기가 한결 우람스러웠다.
통행 금지의 팻말이 서 있어도,

수해 시찰을 나온 듯한 새까만 관용차만은 사뭇 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는 거기에 날리기나 하듯이 더욱 빨리 지나갔다.

요컨대 일종의 모험이기도 했으리라.

안에 타고 있는 얼굴들은 알 길이 없었지만 어련히 심각한 표정들을 했으랴 싶었다.


내려다봄으로 해서 한결 사나운 물굽이가 숫제 강을 주름잡듯 둘둘 말려 오다간,

거의 같은 지점에서 쏴아 하고 부서졌다. 그럴 때마다 구슬,

아니 퉁방울 같은 물거품이 강 위를 휘덮고 때로는

바람결을 따라서 다리 위까지 사뭇 퉁겼다.

그러한 강 한가운데를 잇달아 줄을 지어 떠내려오는 수박이랑 두엄더미들이,

하단서 볼 때보다 훨씬 많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장관에 가까웠다.
“아까 그 송아지는 정말 아깝던데…….”
이런 뚱딴지 같은 소리도 푸득 귓가를 스쳐 갔다.
조마이섬이 있는 먼 명지면 짬은 완전히 물바다로 보였다.

구름을 이고 한가하던 원두막들은 다시 찾아볼 길이 없고,

길찬 포플러나무들도 겨우 대공이만은 남은 듯,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 했다.


지루하게 긴 다리를 지루하게 건너,

물구경 나온 인파를 헤치고 강둑길을 얼마 못 갔을 때였다.

뜻밖에 거기서 윤춘삼 씨와 마주쳤다.

헐레벌떡 빗속을 뛰어오던 송아지 뺄갱이―,

 아니 윤춘삼 씨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물에서 막 건져

올린 사람처럼 젖어 있었다. 하긴 내 꼴도 그랬을 테지만.
“우짠 일인기요?”
하고 덥석 내 손을 검잡는 윤춘삼 씨는, 그

저 반갑다기보다 숫제 고마워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조마이섬은 어찌 됐소?”
수인사란 게 이랬더니,
“말 마이소. 자, 저리 가서 이야기나 합시더…….”
그는 나를 도로 다릿목 쪽으로 끌었다.
“아니, 섬 쪽으로 가 보려 했는데요?”
“가야 아무것도 없소. 모두 피난소로 옮기고,

 남은 건 물바다뿐임더. 우짤라꼬 이 놈의 하늘까지! ……”
별안간 또 한 줄기 쏟아지는 비도 피할 겸 윤춘삼 씨는

나를 다릿목 어떤 가겟집으로 안내했다.

언젠가 하단서 같이 들렀던 집과 거의 비슷한 차림의 주막집이었다.
둘 사이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나 다급하고 또 수다한 말들이 두 사람의 입을 한꺼번에 봉해 버렸다 할까!
“건우네 가족도 무사히 피난했겠지요?”
먼저 내 입에서 아까부터 미뤄 오던 말이 나왔다.
“야…….”
해 놓고도 어쩐지 말끝이 석연치 않았다.

출처 : 단편소설 모래톱 이야기 5부
글쓴이 : 정남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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